관악산 예술인 마을에서 서정주 시인을 만나다 * 원춘옥
2011년 8월 14일 광복절을 하루 앞 둔 날이다.
비가 퍼붓기 시작한 오전을 피해 오후 5시 쯤 그동안 별렀던 서정주님의 집으로 향했다.
4년 전에 문인들과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한 나라의 시인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정도로 폐가와 다름없었다.
담쟁이덩굴과 환삼덩굴이 담을 덮어버렸고 굳게 닫힌 대문은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자식들은 외국에 거주하여 집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방치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려는 것을 급히 서울시에서 사들였다는 그나마 다행인 소식만 접했을 뿐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쟁점 속에 있었던 시인의 친일 행적 때문에 누가 선뜻 나서지 못하고 방치하는 듯 보였다.
안타까움과 씁쓸함에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무심한 하늘만 바라보았었다.
올해 4월에 10년 동안 손대지 못한 집을 수리하여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정주 시인에 관한 연구자료와 시집 그리고 자서전 등을 접했던 터라
그의 집을 개방했다는 소식은 반가움이 더했다.
서정주 시인의 집이라고 쓴 감색 팻말에 마음이 먼저 대문 앞에 섰다.
잡풀로 뒤섞였던 담장은 깔끔하게 칠을 하였고 대문엔 주소와 문패가 반갑게 맞는다.
활짝 열린 대문을 사이로 소박한 정원이 있다.
시인 부부는 직접 꽃과 돌을 구해가며 이곳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그의 자서전에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 영산홍 한 그루를 구입하기 위해 여러번 꽃집을 방문하고 흥정하며
상인에게 '영산홍'이란 시까지 써주며
구입한 식물들은 그의 노력으로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여러 곳을 옮겨 다녔던 시인이
이곳으로 이사한 후 돌아가시기까지(1970-2000년) 30여년간 산 곳이다
유독 꽃에 대한 시를 많이 쓴 시인이었다.
객관적 상관물인 꽃을 소재로 한 그의 시는
젊은시절에는 붉은 빛이 많은 원초적 도화꽃이었지만,
노오란 국화같은 포용의 꽃으로,
그리고 이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하나로 소통하는 무형화된 영원의 꽃으로 피어난다.
또 유년의 시절로 회귀하여 원형의 꽃으로 피어나고자 한다.
시인은 85세(1915-2000)를 살면서 60여년의 시작 활동으로 1,000여편의 시들을 남겼다.
역사의 질곡을 헤쳐나온 우리 현대시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주 시인을 빼놓고는 우리 현대시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인 평가를 떠나서 온 삶으로 써온 처절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그의 시만은
평가절하 당하는 수모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요즘 교과서에서도 그의 시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왠지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서정주의 집 전경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관악구청에서 관리중이다.
문패
관악구로 분리되기 전 영등포구의 주소지
이집은 미당 서정주 시인이 평생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안착하게 된 집이라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당호를 [봉산산방]이라 이름 지었다 .
쑥봉에 마늘 산인데 단군신화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질마재 신화]가 이곳에서 쓰여졌다고 한다.
『질마재 神話』,『떠돌이의 詩』는 유신 통치와 산업화가 가속화되어
우리의 정신이 매몰되어 가던 70년대의 시기이다.
1975년 회갑에 이르러 출간된 『질마재 神話』에서
시인은 현대인이 잊고 살아가는 원형적 고향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원형적 설화에 관심이 많았던 때였임을 알 수가 있다.
대문을 지나 마당 입구에 세워놓은 [ 봉산산방] 안내판
서정주 시인이 직접 그린 건평 24평형의 설계도
공사할 때 들어간 건축자재 계약서 및 영수증
1층에는 안방 건넌방 주방과 화장실이 있다. 넓지 않지만 소박한 모습의 집이다. 2층으로 연결된 좁은 계단을 올라
양 옆으로 방이 배치되어있다. 평소 난초 예찬론자이기도 했던 것처럼 난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만년을 보내셨던 방에는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는 명성을 뒷받침 하듯 평소에 쓰시던 물품들이 정갈하게 걸려있었다.
방옥숙여사와 함께 - 마당에서
[화사집](1941년)의 원초적 발로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이미지는 약화되고
점차 무채색의 무형화된 영원주의로 나아간다.
시인은 [서정주 시선 ](1947년) 이후 동양주의를 탐색한다.
[신라초]에서는 평소 탐독했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신라정신을 읽게 되고
노자사상과 만나면서 서정주는 [동천]에서 둘을 하나로 합일시켜 꽃을 피운다.
창문을 통해 관악산을 올려다보며 시상을 가다듬었을 시인을 떠올려 본다.
자신을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던 시인, 떠들이 의식으로 살아온 세월들은
그의 붓 끝에서 변화를 거듭해왔다.
1925년경 경향파의 이데올러기적 문학에 반기를 들고
순수시를 지향했던 정지용 박용철 김영랑과 모더니즘 주지적 시를 썼던 김기림이 시류를 대변하고 있던 시기에
시인부락을 발간(1936년)하고 인간과 생명성에 대한 탐구에 대한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던 시인의 실험적 정신은
대 시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6.25 전쟁 후 한창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시단에 팽배해 있을 때에도 시인은 이런 기류에 따르지 않고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인 동양주의적 정신인 신라정신을 탐구하게 된다.
또 1970년대의 유신시절에는 원형적 설화에 관심을 쏟는다.
혹자는 이런 시인을 현실을 외면하는 시인이라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떠돌이 시인으로서 늘 변화를 추구하고 실험을 시도했던 그의 성향으로 봤을 때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전북 고창 선운리 질마재에서 평화롭게 어린시절을 보내고
줄포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올라와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던 시인은
광주학생 주모자로 몰리면서 퇴학을 당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된다.
그의 부모는 고등법원 판사가 되길 원했지만 운명적인 삶은 시작되었다.
넝마주의로 생활하다가 가야금 타는 배미사의 안내로
개운사의 종정 박한영 노사 문하에 입문하게 된다.
그후 시인부락을 발간하면서 활발한 할동을 하게 되나 폐간되면서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제주도에서 고창으로 돌아온 시인을 서둘러 부모는 방옥숙 여사와 결혼을 시킨다.
부친의 사망 후 유산을 정리하여 서울 흑석동에 자리잡았지만
2차 태평양 전쟁 말인 일제식민지 하의 극심한 굶주림은 견뎌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심한 학질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시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갖는다.
해방 후 다시 6,25전쟁을 맞은 시인은 가족을 남겨둔 채 종군문인단을 쫒아 대전 대구 부산을 떠돌다가
극심한 정신 신경증세를 앓게 된다. 전장에서 시체를 목격한 탓이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시인은 그런 악조건을 시를 쓰며 견디어 냈다.
1970년 이후 30년 동안 머물며 시를 탄생시킨 봉산산방은
이런 떠돌이의 시인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잠재워 준 곳인지도 모른다.
그는 20대의 혈기 넘치는 방황의 떠돌이와는 달리 노년에는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우물속으로 들어와 [가만한 꽃]으로 피고자 했던 시인이었다.
한복 두루마기와 양복 정장
다양한 넥타이
영산홍 닮은 빛깔의 붉은 한복 조끼
모직 머풀러
말년에는 매일 산의 이름을 외우며 당신의 정신을 가다듬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시인
오직 시쓰는 일에 전념했고 그가 남긴 기념비적인 많은 시들은 우리 문학사를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새롭게 단장된 시인의 집에서 넉넉한 국화꽃 한 송이의 포용력을 배우고
연산홍의 소금에 절인 눈물을 보고, 난초의 푸른 옷깃에 맑은 심호흡을 하고, 매화의 알큰한 사랑을 느껴본다.
그리고 내부의 소리를 담아낼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길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2011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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