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에 버금가는 구성의 다큐멘터리
30여 년이 흐른 후, 소식이 끊긴 친구들을 찾아 격동의 동유럽을 방문한 저자의 여정은 그 자체가 미스터리나 추리소설처럼 흥미롭다.
“두려운 작품, 스피드 있게 한순간에 인간 데생을 하면서도, 행간에서 인물들의 영혼까지 느끼게 해준다. 질투를 일으킬 만큼 대단한 표현력이다.”
-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심사평
역사적 사실과 개인적 사건 혹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긴밀한 구성, 소설에 버금가는 풍부한 표현력과 반어법의 사용 등을 통해 저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저자의 친구들뿐 아니라 친구들의 가족, 부모님 세대의 역사까지 폭넓게 언급함으로써 리차, 아냐, 야스나의 이야기는 더이상 개인의 경험에 그치지 않게 된다.
“개인사나 현대사를 기록한 책들은 존재한다. 이 두 가지를 훌륭하게 접목한 책이 드물 뿐이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보기 드물게 아주 우수한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취미는 독서』의 저자)
이들의 운명 배후에는 1968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탄압으로 짓밟힌 ‘프라하의 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의 붕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독립선언이 발단이 된 유고 다민족 전쟁이 있다. 역사와 민족이라는 화두,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운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화법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지만 심연을 울리는 파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이데올로기가 개인에 미친 영향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상당히 날카롭다. 저자는 “소비에트 학교 아이들은 모두 자국에 대한 애정과 동경을 가지고 있는데, 빈곤과 혼란 상태에 빠진 나라의 아이들일수록 애국심이 강했다”고 평하고 있다. 기쁨에 들떠 귀국했지만 동란으로 목숨을 잃은 아이, 조국에 실망해 다시 외국으로 떠난 아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당면 과제 속에서 열심히 발버둥치는 모습은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격동의 현실을 보여준다. 한편 사회주의를 들여다보는 일은 현재 우리가 소속감을 느끼는 민주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낳기도 한다.
소비에트 학교 선생님들은 제자의 재능을 발견하면 과장될 정도로 법석을 피우는 버릇이 있다. 너무 좋아서 그 기쁨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동료와 반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음악 담당 이바노브나 선생님과 일리치 선생님은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다. 물론 다른 아이들에도 당장에 이 기쁨이 전염되어 그런 재능 있는 아이와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으로부터 행복해하곤 했다.
다른 이의 재능에 이렇게 사리사욕 없이 축복해주는 넓은 마음, 사람 좋은 성향은 러시아인 특유의 국민성이 아닐까 하고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반세기나 지나서다. 러시아어 통역으로 많은 망명 음악가와 무용가를 접했는데 그들은 내게 이런 얘기로 망향의 한을 풀어놓았다.
“서구로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이것만큼은 러시아가 뛰어났다고 절실하게 느낀 게 있어요. 그건 재능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죠. 서구에선 재능이 자기 개인에 속하는 것이지만, 러시아에선 모든 이의 재산이랍니다. 그러니 이곳에선 재능 있는 자를 시기해서 어떻게 하면 끌어내릴까 안달이죠. 러시아에선 재능 있는 자는 무조건 사랑받고 모두가 받쳐주는데…….”
- 본문 179~180쪽
이념적 우위를 벗어던진 따뜻한 시선은 이데올로기라는 껍질을 벗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한 결과이다. 애정과 객관성의 줄다리기는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주제의식을 유머와 희망으로 껴안으며 설득력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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