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용한 공기
이기철
꽃이 벗어놓은 신발이 열매가 되는 날도
한 번도 그것의 고갈을 염려하지 않은 채
햇빛을 사용하고 공기를 사용한다
라일락이 낭보처럼 피는 날도
보랏빛에게 얼마만큼 아프냐 묻지도 않고
옷을 사용하고 신발을 사용한다
봄날이 오전 일곱 시를 데리고 오는 아침마다
치약과 면도칼과 비누를 소모하고
잠들기 전까지 헬 수 없는 수의 말을 낭비하고
허파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내 몸을 빠져나간 오줌과 똥이 강물을 더럽힌다
바람이 풀밭융단을 밟고 지나가는 날도
만져본 적 없는 광년의 길을 걸어
내게 도착한 햇빛에게 고맙단 말 한 마디 없이 온기를 빼앗고
저 혼자 넉넉한 들판의 푸른 식구들을 베어 끼니를 때우고
내일 태어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아낌없이 산의 푸나무들을 소모한다
홀씨만한 참회도 없는 이런 말들이
시가 되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이 시를 읽어주길 바라고
누군가가 이런 말에 감동해주길 바라는
아, 참회의 길은 어느 만큼 큰가
속죄의 길은 어느 만큼 미려한가
<시와 정신> 2012년 봄호
[여람의 시읽기]
공기를, 물을, 햇볕을, 나무를... 수없이 무료로 사용하면서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했던 그동안의 죄값은 얼마나 큰가
길을 걸으면서 뒤를 돌아본다. 자꾸 뒤가 캥긴다
담장을 오르던 덩쿨장미가 이내 풀기를 내려 놓고 스스로 꽃잎을 떨구는 유월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향기를 소비하고, 또 다른 계절에게 빚을 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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