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2012 미당문학상 수상작
[여람의 시읽기]
무엇을 잊고 싶었을까
도시의 이쪽과 저쪽으로 몰리며 위태롭게 직장을 다니는 그는
취객이 되어 현세의 스위치를 아주 꺼높고 죽은듯이 누워있다
전봇대의 옷을 걸고 양말도 벗어두고 관에 들어가듯 벤치에 누운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시인은 이런 샐러리맨의 안타까운 모습에
이불을 덮어주고 부위봉투를 건네고 싶은 동정심을 느낀다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는 현실을 풍자로 풀어 놓은 시,
따뜻함이 있어 봄밤을 어슬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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