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담詩談

바람의 구문론/ 이종섶

여람 2019. 3. 5. 02:46

바람의 구문론

 

                                    이종섶

 

 

  바람은 형용사다 나무를 흔들리게 하고 깃발을 휘날리게 한다 나무와 깃발 같은 것들 앞에 흔들린다와 휘날린다를 붙이는 것은 목숨과도 같아서 그런 표현이 사라지면 흔적조차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바람은 동사도 된다 바닥에 있는 것들을 날아가게 하고 무생물체까지도 움직이게 한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야 바람 따라 움직이지 않겠지만 생명이 없는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며 생명을 흉내낸다 바람을 통해 잠깐씩 살다 가는 목숨들이 아주 많다 바람은 접속사 역할도 한다 나무와 나무를 이어주며 꽃과 꽃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까지도 만나게 한다 바람이 없으면 외롭게 살다가 저 혼자 마감하는 세상 바람이 있어 서로가 손길을 스치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은 그러나 명사는 아니다 명사의 형질이 없어 무엇이든 명사로 보이는 순간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꾸며줄 수도 있고 움직여줄 수도 있으나 대상 그 자체는 결코 되지 못하는 비문(秘文) 바람은 그러므로 존재사다 모든 것이 되고 싶으나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한 점 미련도 없이 대상의 존재를 다양하게 그려내는 문법에 만족한다 명사와 명사 사이에 불기도 하고 한 명사를 불어 다른 명사를 불게도 하는 구문론 읽을수록 끝이 없고 쓸수록 신비롭다

 

 

시집『바람의 구문론』2015. 푸른사상

'시담詩談'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쿠 시 모음집   (0) 2019.05.26
시를 읽는다/ 박완서  (0) 2019.03.05
어둠 속의 여행/ 윌리엄 스태퍼드  (0) 2019.03.05
바람의 구문론/ 이종섶   (0) 2019.03.05
프라하의 소녀시대  (0) 2019.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