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사과의 변명

여람 2016. 5. 4. 21:30


 

 

 

 


사과의 변명 

 

 

원춘옥

 

 

허공에서 치밀하게 익어가던 나무의 약속들

단물 고인 태양의 육질엔 이빨이 가지런하다

정갈한 이마에 흘러내리는 빛

누구에게는 아침이 되고 또 저녁이 되는

 

볕과 비를 곡진히 모시던 내밀한 엉덩이

씨방을 끌어안고 한 철을 버텼다

바람이 그들의 내력을 필사하지 못해

시고 떫은 말만 답습하고 뜨거운 말은 빠뜨렸다

 

꼭지를 놓친 함량 미달의 사랑은

한쪽이 눌리거나 짓물러서 일찍 마침표를 찍었다

바구니에 담겨 덤으로 얹히거나 짐승의 밥이 되었다

 

제대로 아삭거리던 시절이 있었던가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 잠은 흔들리기 일쑤였고

무게를 공략한 벌레들이 파고들 때마다

한쪽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삼켜야 했다

 

그는 무사히 착지했다

중심을 놓지 않은 푸른 대궁

치골 속에 숨겨둔 까만 씨앗 하나 뱉어 놓는다

마지막까지 향기 잃지 않은 어느 날의 절정

그들의 변명을 살뜰히 씹어본다

 

시와미학 2016 봄호